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트리다테스 6세 (문단 편집) === [[제2차 미트리다테스 전쟁]] === 미트리다테스는 지난 전쟁을 치르느라 국력이 쇠약해진 나라를 재건하는 한편, 용병대를 대거 고용해 지난 전쟁으로 잃은 병력을 복구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이때 그는 팔랑크스가 로마 군단병을 상대로 연전연패한 걸 교훈으로 삼아 팔랑크스를 버리고 기병과 궁병 위주로 군대 체계를 개편했다. 보스포러스 지역과 콜키스에서 과중한 세금에 반발하여 반란이 일어나자, 장남 미트리다테스를 이 지역의 섭정으로 삼아서 이를 진압하게 했다. 장남 미트리다테스는 반란을 모조리 제압하고 질서를 잡았지만, 너무 유능한 나머지 주민들의 추앙을 한 몸에 받으면서 아버지의 질투를 사고 말았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미트리다테스 6세는 장남이 왕이 되려는 야망을 품고 주민들의 신망을 얻고 있다고 의심했다고 한다. 그는 아들을 시노페로 소환한 뒤 황금 족쇄에 묶은 채 감옥에 넣고 나중에 처형했다. 그 후 모페레네스[* 로마의 지리학자 [[스트라본]]의 외삼촌이다.]가 콜키스를 관리하는 임무를 맡았다. 한편, 그는 폰토스군 총사령관으로서 술라에 맞섰으나 연전연패한 전적이 있던 아르켈라오스가 미트리다테스 필로파토르와 손잡고 역모를 도모했다고 의심했다. 아르켈라오스는 이 사실을 알게 되자 폰토스에서 달아나 무레나에게 귀순한 뒤 미트리다테스가 로마를 공격하기 위해 대규모 병력을 징집했으니 먼저 침공하라고 설득했다. 무레나는 핌브리아 장병들의 군심을 사고 공적을 세울 기회가 왔다고 여기고, 사실 여부를 따지지 않고 본국에 허락을 구하지도 않은 채 전쟁을 단행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기원전 83년, 그는 카파도키아와 폰토스의 국경 인근의 마을인 코마나를 습격하여 약탈을 자행했다. 미트리다테스는 이 당시 콜키스인과 부족들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함대를 이끌고 간 상황이라서 코마나를 구원할 병력을 보내기 힘들었다. 이에 그는 평화 협정을 요구하는 사절을 보냈다. 그러나 무레나는 술라가 그리스로 돌아가기 전에 평화 협정을 문서화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은 어떤 조약도 보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그는 약탈을 벌인 후 카파도키아로 돌아와 그곳에서 겨울을 보냈다. 미트리다테스는 사절단을 로마로 보내 평화 협정을 준수하라고 요구했다. 기원전 82년에 무레나는 미트레다테스에 속한 400개의 마을을 점거했지만 미트리다테스는 사절단이 오기를 기다릴 뿐 그와 전투를 벌이려 하지 않았다. 무레나는 막대한 제물을 챙기고 카파도키아로 부사히 돌아갔다. 얼마 후, 술라가 보낸 사절이 무레나를 찾아와 조약이 여전히 유효하니 폰토스 왕국을 상대로 적대행위를 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일부 기록에 따르면, 술라는 무레나에게 폰토스를 좀더 괴롭히라고 종용하는 밀서를 보냈다고 한다. 무레나는 사절 앞에서 본국의 지령을 따르겠다고 밝혔지만, 사절이 돌아가자마자 전쟁을 재개했다. 키트리다테스는 로마가 전쟁을 선언했다고 믿고 즉각 대응했다. 우선 카파도키아 출신의 귀족으로 미트리다테스에 의해 카파도키아 왕으로 옹립되었다가 술라에 의해 축출된 뒤 미트리다테스의 부관을 맡고 있던 고르디오스에게 일부 병력을 맡겨 무레나를 견제하게 했다. 고르디오스는 할라스 강가에서 로마군을 목격하고 고지대에 진영을 설치한 뒤 미트리다테스가 올때까지 기다렸다. 무레나는 소규모의 적이 고지대에 진을 치고 있는 걸 확인했지만, 지난 전쟁 때 연전연패한 폰토스군을 우습게 여기고 강 건너편 평야지대에 진영을 세웠다. 얼마 후 현장에 도착한 미트리다테스 6세는 적이 별다른 경계없이 진영에서 쉬고 있는 걸 보고 기병대를 대거 파견해 적진으로 돌격시키고 궁병대에게 그 뒤를 따르며 기병대를 지원하게 했다. 로마군은 지난 전쟁과는 달리 팔랑크스를 대동하지 않고 기병과 궁병 위주로 몰려오는 적군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무레나는 급히 일부 보병대로 기병대를 저지하게 해 시간을 끌게 하는 한편, 나머지 병사들에게 언덕 위에서 전투 대형을 갖추도록 했다. 그러나 폰토스 기병대는 앞을 가로막은 로마 보병대를 무참히 짓밟고 언덕 위의 적을 향해 돌격했다. 미처 전열을 갖출 틈이 없었던 로마군은 순식간에 압도되었고, 무레나는 몇몇 측근만 대동해 전장을 가까스로 빠져나갔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로마의 편을 들었던 소아시아의 많은 도시 국가들이 미트리다테스에게 귀순했다. 미트리다테스는 여세를 몰아 카파도키아로 진군해 모든 로마군을 축출하는 데 성공했다. 술라는 미트리다테스와 또 다시 전쟁을 벌이는 무레나를 비난하고 가비니우스를 파견해 미트리다테스와 전쟁을 벌이지 말라는 명령을 전달하게 했다. 또한 가비니우스는 미트리다테스와 카파도키아의 아리오바자네스 1세를 화해시키기 위해 협상을 주관했다. 미트리다테스는 그의 4살짜리 딸과 아리오바자네스를 약혼시켰고 아리오바자네스 1세의 카파도키아에서의 영유권을 인정했다. 그리고 무레나는 로마로 소환되어 정계를 강제로 꺼나 고향에서 여생을 보내야 했다. 미트리다테스는 이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지난 전쟁의 패배로 손상되었던 명성을 회복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